버라지 리뷰 - 빛나는 두뇌와 균형잡힌 몸매의 게임
버라지(Barrage) 리뷰

엄마 닮았니, 아빠 닮았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만큼이나, 유아기 때 가장 많이 듣지만, 가장 쓸모없는 질문이겠다. 어느 고대 종교 창시자가 아닌 다음에야, 모든 인간은 아버지의 정(精)과 어머니의 육(肉)으로 이루어졌거늘, 누굴 닮았는지를 왜 그리 따지는가. 혹시 발가락이라도 닮았다고 주장하고 싶은 눈물 겨운 수컷의 호소인가? 그래서 어느 한쪽을 안 닮았다고 해서 친권을 포기할 의도가 아니라면, 왜 그리 확인을 하고 싶은 걸까.
비슷한 질문이 보드게이머들 사이에도 있는가보다.
테마 게임이니, 유로 게임이니?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모든 게임은 테마와 시스템의 결합물이다. 다만, 제작자의 성향상 어느 쪽에 좀 더 무게 중심이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버린 게임은 극히 드물다.
게다가 혹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게임의 호오를 가린다고 하니까 더욱 난감해진다.
나는 테마 게임을 싫어한다. 이 게임은 테마 게임이다. 고로 나는 이 게임을 싫어한다.
기호의 세계에서 이런 완벽한 논리구조를 가진 분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넘치는 보드게임의 세계에서 나름의 선택기준이겠지만, 어떤 게임도 저렇게 무 자르듯이 가를 수 없다는 점에서 꽤나 안타까운 기준이 아닐까 싶다.
각설탕 하나 먹고.
필자는 테마와 시스템이 잘 어우러진 게임을 선호한다. 빛나는 두뇌와 균형잡힌 몸을 가진 인간에게 가장 매력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드문 것처럼, 그런 게임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게임. 바로 그런 게임이다. 버라지(Barrage)
생경한 단어에, 더 생경한 한글제목. Dam이라고 작명하면, 동음이의어에 화들짝 놀랄 영미권 게이머를 배려한 제목이라 이해한다고 해도, 더 심각한 유음이의어가 존재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좀 더 세련된 역어 선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긴, 댐이 되었든, 보가 되었든, 강바닥을 사정없이 공구리로 긁어버린, 현재진행형의 트라우마를 가진 한국인들에게는 차라리 버러지라고 불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알프스의 수력발전을 테마로 하는 게임이다. 그런데 어째서 필자는 이 게임에서 매력을 느낀 것일까.
일단, 테마가 친숙하다.
수력발전에 필요한 설비를 건설하고, 그걸 가동해서 전기를 생산한다. 그리고, 계약자에게 해당 전기를 전달하면 보상을 받는다.
이런 테마는 굳이 복잡한 사전지식이 없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돈을 모으고, 굴착기와 레미콘을 구매하는 것도 전혀 위화감없이 녹아든다.
어떤 행동을 하는데, “이걸 왜 하지?”라는 물음을 야기하는 게임들이 있는데, 적어도 그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녹아드는 테마가 아닌 것이다.
그밖의 행동들도 테마와 잘 맞는다. 발전을 하려면 터빈을 돌려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둑에 가두어둔 물을 수관(도관)을 통해 발전소로 보내야 한다. 그리고 발전량은 수량과 낙차에 비례한다. 만약 다른 테마였다면, 꽤나 번잡할 것 같은 이런 설명도,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해할만한 테마 덕분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시스템도 유려하다.
일꾼 놓기 특유의 선점 경쟁이야 다른 게임에서도 많이 쓰였고, 이미 오랫동안 검증받은 매커니즘이므로, 이 게임에서 잘 구현했다고 해서 특이할 건 없어보인다. 설비를 건설할 수록 라운드마다 받는 보상이 증가하는 걸 표현하기 위해 개인 보드판에 단차를 만들어서 설비로 가리는 시스템도 제법 여기저기서 많이 사용한 바 있다.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물론 잘 구현되어있다.
그런데, 필자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든 독창적 시스템이 있다.
뭔가를 만들 때, 자원을 소비하는 건, input과 output에 익숙한 우리에겐 그다지 난해한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해당 자원이 사용하면서 사라지는 소비재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시간동안은 사용이 불가능한 자원이라면? 이거 꽤 오랫동안 보드게임에서는 구현하기 힘든 난제였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 한도에서는 그렇다.
이 게임은 이걸 회전판이라는 시스템으로 구현했다. 레미콘과 굴착기는 설비 건설에 필수자원이지만, 소비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용하고 사라지는 자원은 아니라고 해도, 일단 건설에 투입하면, 일정 시간동안 다른 건설에 투입할 수 없다는 제약이 따른다. 이 게임은 회전판을 통해, 일단 투입된 자원이 다시 한 바퀴를 돌아 나올 때까지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구현했다. 회전판 자체는 우베 로젠베르크도 자원 가치의 증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바 있지만, 이렇게 내구재의 가용상황에 제약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 건 적어도 필자의 기준에서는 처음 보는 시스템이다. 독창적이면서도 탁월하다.
이 시스템 덕분에, 돈과 엔지니어를 사용해서 회전판의 회전을 가속하는 행동들도 이해가 간다. 공기(공사기간)단축을 사업의 절체절명 숙제로 여겼던 고도성장기 대기업 총수들의 이야기가, 한국 경제발전 신화에서는 쑥과 마늘 같은 소재이니 말이다. 아! 이건 아직도 판교 및 가산과 구로디지털 단지의 등대가 되어있는 어떤 기업들의 엔지니어에겐 현재진행형이겠구나. 이것은 너무 현실을 잘 녹인 블랙코미디가 아닌가!
그런데, 이 게임… 단지 잘 짜인 시스템과 잘 녹인 테마가 전부가 아니었다.
게임을 하다보면, 규칙은 복잡한데, 정작 게임은 쉽게 풀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간단해 보이는 규칙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내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두뇌회전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게임은 전형적인 후자이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적당한 테크를 타서, Snowballing을 하는 게임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아마도(?) 창대하리라는 믿음을 먹고서, 오늘도 굴착기를 돌리는 순진한 수력발전 사업가들. 그러다보니, 두어수 앞을 내다보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남들이 호박을 굴리고 있는동안 좁쌀을 굴리는 자신을 보게 된다. 단순한 행동들일지라도, 유기적으로 연계해야 하기 때문에 한 수 한 수마다 깊은 고뇌를 하게 된다.
이런 유형의 게임은 혼자 놀기식으로 흘러가기가 쉽다. 이른 바 다인용 솔리테어( Multi-player solitare)가 되어, 옆 사람이 뭘 하든 신경쓰지 않고 오직 내 게임판만 쳐다보는 방식으로 게임이 진행된다. 최근 수년간 보드게임계의 주류(Main stream)가 이런 유형이다보니, 공용 게임판에서 서로 찌그닥째그닥 거리는 고전(?)게임들이 그리워 지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감상이다.
그런데, 이 게임은 분명 개인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결과물은 공용보드에 펼쳐진다. 그리고, 이는 내 차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게임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내가 놓은 발전소 옆에 살포시 놓이는 타인의 발전소. 분명 저 물은 내 것이었어야 하는데, 왜 다른 수관(도관)을 타고, 다른 발전소로 흘러간단 말인가. 분명 원래 계획대로라면, 더 좋은 계약을 따내고, 더 좋은 수관을 통해 더 많은 유량을 확보해서 발전왕이 되었어야 하는데,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는 이미 강바닥, 아니 둑바닥이 말라버려서 발전거지가 되어버린다.
물 한 방울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본격 수자원 공사 협찬 게임. 다음 라운드에 흘러들어올 알프스의 축복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 열심히 둑을 쌓고, 내 일을 다했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盡人事待天命) 마음으로 경건하게 알프스 정상을 쳐다보면, 꼭 내 머리 위에 세숫대야를 들이대는 이들이 있으니... 아아~ 일을 꾀하는 건 사람이로되, 이루는 건 하늘, 아니 저 놈이로구나. (謀事在人 成事在天...?)
이 게임을 하다보면, 누군가의 둑 건설 한 번에 여기저기서 장탄식이 터져나온다. 플랜 A, B로도 모자라 C, D까지 만들어야 하는 복마전이 펼쳐진다. 오래간만에 공용보드에서 느껴보는 찌그닥째그닥의 느낌!
분명 게임 규칙만으로는 그려지지 않았던 상황들이 보드 위에 펼쳐진다. 어떤 게이머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이 게임은 테마와 시스템의 조화도 멋지지만, 작가와 게이머의 조화도 아름답다. 말 그대로 작가가 만들기 시작했지만, 게이머가 완성하는 게임.
그런데...
이 게임에 대해서 필자에게 말해준 이는, 지금은 강호에서 거의 모습을 감춘 은거 고수, 노피어님이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이거 출시하면 사세요. 안 사면 버러지!”
몇 달이 지나서, 모 회사가 1천 개 한정으로 한글판 판매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0만원에 육박하는 가격과 1천 카피 제작이라는 만용에 우려를 금할 수 없었지만, 판매 개시 3시간만에 1억 매출을 올리며 매진! 필자의 우려가 버러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직후 이 게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최근 보드게임들이 높은 가격과 그에 걸맞는 화려한 구성물로 무장하면서, 이로 인해 눈이 높아진 게이머들에겐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 구성물에 대한 불만과 비난이 폭주하고, 게시판이 버라지 쓰나미로 넘실거렸다. 심지어 “역대급 분뇨”라는 구수한(?) 평가까지 등장했다. 그 시기에 다른 리뷰를 썼던 koon님은 자기 리뷰가 버러지처럼 버려졌다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아무래도 노래 따라가는 가수의 운명처럼, 제목 번역의 업보인 듯 하지만, 아무래도 비난의 정도가 좀 과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무렵, 문득 오래전 읽었던 ntrolls님의 명문(링크)이 떠올랐다.
“게임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하의 이 명문은, 고전이라 부르는데 조금도 망설일 수 없을 작품들의 case study를 통해, 어떤 요소들이 게임을 만들어내는지를 날카로운 통찰로 말하고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중요한 두 요소는 바로 규칙과 구성물이다. 규칙의 중요성이야 두 번 말할 필요 없지만, 구성물 역시, 어떤 사고의 결과물을 게임으로 구현할 때, 더불어 그것이 게임으로서 기능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구성물은 규칙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물성(物性)을 가지면 충분하지, 꺼낼 때마다 감탄과 부러움을 사는 구성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버라지는, 훌륭한 규칙과, 그 속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데 충분한 구성물을 가지고 있다. 비록 약간의 흠결이 있다고 해서, “게임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스크래치와 함께 사라졌소”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아는 것이 힘이라길래 열심히 공부했더니,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는 것처럼,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을 수 있지만, 빛 좋은 개살구도 존재한다. 예쁜 쓰레기와 허름한 보물의 모순이 공존하는 것이 현실세계이다. 잘 빠진 외관은 분명 중요한 요소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게임을 규정하면서 지나치게 구성물의 화려함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달력종이 재질의 보드와, 핀셋으로 집어야 하는 구성품들, 심지어 제작사에서 주사위와 게임 화폐도 제공하지 않은 게임을 사들고 와서, 밤새워 돌리며 즐거워하던 그 때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우리는 그보다 훨씬 전에 흙바닥에 선만 몇 개 그어놓고도, 어머니의 저녁식사 호출과 등짝 스매싱이 있을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며 놀았던 적이 있지 않은가.
시스템과 테마의 조화, 작가와 게이머의 앙상블. 누군가의 둑짓기에, 뚝배기가 터질지언정, 적어도 “역대급 분뇨”라고 불리기엔, 필자의 경험이 너무나 향기로웠기에 몇 자 적어보았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알프스를 우러러
물 한 방울 버려짐이 없기를,
옆집에 들어서는 발전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감전의 짜릿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스치는 물방울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레미콘을
수거해야겠다.
오늘 밤에도 굴착기가 회전판을 스치운다.
P.s. 비닐포장과 프로텍터 등, 필자의 부질없는 꼼꼼함에, 손수 게임판에 오뎅국물을 투척함으로서, “게임의 참재미는, 구성물의 일정한 훼손을 감수하고, 사람들과 함께 돌리는 것에 있다”라는 큰 가르침을 시전해준 프쉬케님에게 이 글을 바친다.